주저리 - 7
- 2024.11.13 좋아하는 시들
누이여
또다시 은비늘 더미를 일으켜세우며
시간이 빠르게 이동하였다
어느 날의 잔잔한 어둠이
이파리 하나 피우지 못한 너의 생애를
소리없이 꺾어갔던 그 투명한
기억을 향하여 봄이 왔다
살아 있는 나는 세월을 모른다
네가 가져간 시간과 버리고 간
시간들의 얽힌 영토 속에서
한 뼘의 폭풍도 없이 나는 고요했다
다만 햇덩이 이글거리는 벌판을
맨발로 산보할 때
어김없이 시간은 솟구치며 떨어져
이슬 턴 풀잎새로 엉겅퀴 바늘을
살라주었다
봄은 살아 있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다
떠다니는 내 기억의 얼음장마다
부르지 않아도 뜨거운 안개가 쌓일 뿐이다
잠글 수 없는 것이 어디 시간뿐이랴
아아, 하나의 작은 죽음이 얼마나 큰 죽음들을 거느리는가
나리 나리 개나리
네가 두드릴 곳 하나 없는 거리
봄은 또다시 접혔던 꽃술을 펴고
찬물로 눈을 헹구며 유령처럼 나는 꽃을 꺾는다
기형도, <나리 나리 개나리>
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
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.
괴로움
외로움
그리움
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.
최승자, <내 청춘의 영원한>
보이지 않아도 닿을 때 있지
우리 같이 살자 응?
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
기차를 타고
어디든 데려다 주고 싶다고 생각하다가
아직 없는 손들에게 쥐어 주는 마음 같아서
홀연하다
만져지지 않아도
지금쯤 그 골목의 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
흔들리는 손가락의 미래들
나도 누군가의 홀연이었을까
같이 썩어가고 싶은 마음처럼
매달린 채 익어가는 별
너 때문에 살았다고
끝없이 미뤄둔 말들이 있었다고
사라진 행성이 그리운 금요일이면
없는 손의 기억으로
나는 혼자
방금 내게 닿았다가
지금 막 떠난 세계에 대해
잠시 따뜻했던 그것의 긴 머리카락을 떠올린다
어제의 식물들은 금요일을 매단 채 죽어 있다
그것은
원래 내게 없던 문장들
그러니까 나는 여전히 혼자 남았다는 말
점 하나가 붙잡고 있는 세계라는 말
이승희, <홀연>
지금 바깥에서는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까
사람이 사람을 버려 영혼이 찢어짐을
사람이 사람을 멸시해 영혼이 피 흘림을
사람이 사람을 분노케 해 영혼이 고름 흘림을
시를 쓰면서, 시를 웩웩 토하면서 우리는 배웠다
내가 너한테 관심갖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를
네가 나의 사랑을 받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를
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를.
이승하, <정신병동 시화전5> 中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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집안 때문에 유년 시절부터 산더미같은 시집과 함께였다.
자연스럽게 좋아하는 시도 그저 그랬던 시도 별로였던 시도 많아졌다.
특히 이 시들은 몇 년 동안이나 아무리 읽어도 읽어도 좋아서...
다이어리에도, 학생 때 쓰던 블로그에도, 내가 마음 놓을 공간이 생길 때마다 여기저기 붙여놓았다...
어제는 오랜만에 엄마와 기형도 이야기를 해서, 마침 이 곳에도 옮겨 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.
<욥의 슬픔을 아시나요>를 책가방에 넣어두고 다니다 비 오는 날 하교 버스 안에서 읽던 날의 공기 냄새가 지금도 생생하다.
이젠 분명히 나를 구성하는 것들.